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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

퇴계의 학문

이황이 <<주자대전>>을 입수한 것은 중종 38년, 즉 그의 43세 때였고, 이 <<주자대전>>은 명나라 가정간본(嘉靖刊本)의 복각본(復刻本)이었으며, 가정간본의 대본(臺本)은 송나라 때 간행된 것을 명나라 때 복간한 성화간본(成化刊本)의 수보본(修補本)이었지만, 그가 <<주자대전>>을 미독(味讀)하기 시작한 것은 풍기군수를 사퇴한 49세 이후의 일이었다.


이황은 이에 앞서 이미 <<심경부주>>·<<태극도설>>·<<주역>>·<<논어집주>>등의 공부에 의하여 주자학의 대강을 이해하고 있었으나, <<주자대전>>을 완미(玩味)함으로써 그의 학문이 한결 심화되었고, 마침내 주자의 서한문의 초록과 주해에 힘을 기울였는데, 그의 학문이 원숙하기 시작한 것은 50세 이후부터였다고 생각된다.


50세 이후의 학구활동 가운데서 주요한 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53세에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 天命圖說>을 개정하고 후서(後敍)를 썼고, 또한 <<연평답문 延平答問>>을 교정하고 후어(後語)를 지었다. 54세에 노수신(盧守愼)의 <숙흥야매잠주 夙興夜寐箴註>에 관하여 논술하였다. 56세에 향약을 기초, 57세에 <<역학계몽전의 易學啓蒙傳疑>>를 완성, 58세에 <<주자서절요>> 및 <<자성록>>을 거의 완결지어 그 서(序)를 썼다.


59세에 황중거(黃仲擧)에 답하여 <<백록동규집해 白鹿洞規集解>>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또한 기대승(奇大升)과 더불어 사단칠정에 관한 질의 응답을 하였고, 61세에 이언적(李彦迪)의 <<태극문변 太極問辨>>을 읽고 크게 감동하였다. 62세에 <<전도수언 傳道粹言>>을 교정하고 발문을 썼으며, 63세에 <<송원이학통록 宋元理學通錄>>의 초고를 탈고하여 그 서(序)를 썼다. 64세에 이연방(李蓮坊)의 심무체용론(心無體用論)을 논박하였고, 66세에 이언적의 유고를 정리, 행장을 썼고 <<심경후론 心經後論>>을 지었다. 68세에 선조에게 <무진육조소>를 상서하였으며, <사잠>·<<논어집주>>·<<주역>>·<서명> 등을 강의하였다. 또한 그간 학구의 만년의 결정체인 <<성학십도>>를 저작하여 왕에게 헌상하였다.


<무진육조소>의 내용은, 제1조 계통을 중히 여겨 백부인 선제(先帝)명종에게 인효(仁孝)를 온전히 할 것, 제2조 시신(侍臣)·궁인의 참언(讖言)·간언(間言)을 두절하게 하여 명종궁(明宗宮)과 선조궁(宣祖宮)사이에 친교가 이루어지게 할 것, 제3조 성학(聖學)을 돈독히 존숭하여 그것을 가지고 정치의 근본을 정립할 것, 제4조 인군(人君) 스스로가 모범적으로 도술(道術)을 밝힘으로써 인심을 광정(匡正)할 것, 제5조 군주가 대신에게 진심을 다하여 접하고 대간(臺諫)을 잘 채용하여 군주의 이목을 가리게 하지 않을 것, 제6조 인주(人主)는 자기의 과실을 반성하고 자기의 정치를 수정하여 하늘의 인애(仁愛)를 받을 것 등으로, 시무 6개조를 극명하게 상주한 풍격(風格) 높은 명문이다.


<<성학십도>>는 제1도 태극도(太極圖), 제2도 서명도(西銘圖), 제3도 소학도(小學圖), 제4도 대학도(大學圖), 제5도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제6도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제7도 인설도(仁說圖), 제8도 심학도(心學圖), 제9도 경재잠도(敬齋箴圖), 제10도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와 도설(圖說)·제사(題辭)·규약 등 부수문(附隨文)으로 되어 있다.


제1도는 도와 도설이 모두 주돈이(周敦 )의 저작이며, 제2도에서 <서명>은 장재의 글이고, 도는 정임은(程林隱)의 작품이다. 제3도에서 제사는 주자의 말이고, 도는 <<소학>>의 목록에 의한 이황의 작품이다. 제4도에서 본문은 주자의 <<대학경 大學經>>일장(章)이고, 도는 권근(權近)의 작품이다. 제5도에서 규약은 주자의 글이고 도는 이황의 작품이며, 제6도에서 상도(上圖) 및 도설은 정임은의 저작이고 도는 이황의 작품이다. 제7도는 도 및 도설이 모두 주자의 저작이고, 제8도는 도 및 도설이 모두 정임은의 저작, 제9도에서 잠은 주자의 말이고 도는 왕노재(王魯齋)의 작품이며, 제10도에서 잠은 진남당(陳南塘)의 말이고 도는 이황의 작품이다. 그러므로 요컨대 제3·5·10도와 제6도의 중간 하도(下圖) 등 5개처만이 이황의 작품이고, 나머지 17개처는 상기한 선현들의 저작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들 유학사상의 정수들의 집약은 이황에 의하여 독창적으로 배치되어 서로 유기적으로 관련됨으로써 생명 있는 전체적 체계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황의 학문은 일대를 풍미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를 통하여 영남을 배경으로 한 주리적(主理的)인 퇴계학파를 형성해왔고, 도쿠가와(德川家康) 이래로 일본 유학의 기몬학파(崎門學派) 및 구마모토학파(熊本學派)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왔다. 또한, 개화기 중국의 정신적 지도자에게서도 크게 존숭을 받아, 한국뿐만아니라 동양 3국에서 도의철학(道義哲學)의 건설자이며 실천자였다고 볼 수 있다.


<<언행록>>에 의하면, 조목(趙穆)이 이덕홍(李德弘)에게 "퇴계선생에게는 성현이라 할만 한 풍모가 있다."고 하였을 때 덕홍은 "풍모만이 훌륭한 것이 아니다."라고 답하였다 한다. 그리고 <<언행통술 言行通述>>에서 정자중(鄭子中)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선생은 우리나라에 성현의 도가 두절된 뒤에 탄생하여, 스승 없이 초연히 도학을 회득(會得)하였다. 그 순수한 자질, 정치(精緻)한 견해, 홍의(弘毅)한 마음, 고명한 학(學)은 성현의 도를 일신에 계승하였고, 그 언설(言說)은 백대(百代)의 후에까지 영향을 끼칠 것이며, 그 공적은 선성(先聖)에게 빛을 던져 선성의 학(學)을 후학의 사람들에게 베풀었다. 이러한 분은 우리 동방의 나라에서 오직 한 분뿐이다." 위에서 밝힌 사실만 가지고도 우리는 그가 제자들에게서 성현의 예우를 받는 한국유림에서 찬연히 빛나는 제일인자임을 엿볼 수 있게 된다.


이황의 학풍을 따른 자는 당대의 유성룡(柳成龍)·정구(鄭逑)·김성일(金誠一)·조목·이덕홍·기대승·김운월당(金雲月堂)·금응협(琴應夾)·이산해(李山海)·정탁(鄭琢)·정자중·구경서(具景瑞)·조호익(曺好益)·황준량(黃俊良)·이강이(李剛而) 등을 위시한 260여인에 이르렀고, 나아가서 성혼(成渾)·정시한(丁時翰)·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익(李瀷)·이상정(李象靖)·유치명(柳致明)·이진상(李震相)·곽종석(郭鍾錫)·이항로(李恒老)·유중교(柳重敎)·기정진(奇正鎭) 등등을 잇는 영남학파 및 친영남학파를 포괄한 주리파 철학을 형서하게 하였으니, 이는 실로 한국유학사상의 일대장관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특히 이익은 <<이자수어 李子粹語>>를 찬술하여 그에게 성인(聖人)의 칭호를 붙였고, 정약용(丁若鏞)은 <도산사숙록 陶山私淑錄>을 써서 그에 대한 흠모의 정을 술회하였다.


임진왜란 후 이황의 문집은 일본으로 반출되어 도쿠가와가 집정(執政)한 에도(江戶)시대에 그의 저술 11종 46권 45책이 일본각판으로 복간되어 일본 근세유학의 개조(開祖) 후지와라(藤原惺窩) 이래로 이 나라 유학사상의 주류인 기몬학파 및 구마모토학파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고, 이황은 이 두 학파로부터 대대세세(代代世世)로 신명(神明)처럼 존숭을 받아왔다.